나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2025. 2. 3. 02:40청소년 상담소(방황하는 청소년들 이해하기 위한)

한 교육자의 헌신은 많은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사람은 만들어지는 거다." 이 문장에는 깊은 진리가 담겨있다. 타고난 성격도 결국 다듬어지고 성숙해진다. 마치 다이아도 처음에는 돌덩이였던 것처럼. 그 과정에서 교육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연 매출 80억이 넘는 사업체를 일구어낸 한 기업가의 성공 뒤에는, 한 교사의 헌신적인 지도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성격은 학교생활을 적응하기 어려웠다. 장난감에 쉽게 실증을 내고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었다. 지금 보면 그런 성격이 오히려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 사업가로서의 도전정신이 되었다. 우리 딸이 인형에 쉽게 싫증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에서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채 안산의 한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했을 때만 해도, 미래는 불확실했다. 공부보다 알바에 흥미가 있었다. 시간당 2000원을 받는 아르바이트가 오히려 더 재미있었다. 학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대책 없이 방황의 길로 접어들었다.

 

학교를 그만두려 했던 그날, 운명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등교를 안 하고 집에서 늦잠을 자고 있었다. 작은 흔들림이 점점 큰 흔들림으로 변했다. 나는 그 흔들림에 눈을 뜨게 되었다. 눈앞에 나타난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일어나, 학교 가자"라는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당시 선생님을 모시고 온 친구가 원망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내가 성공을 했을까 싶다. 그렇게 억지로 끌려간 시간은 나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정학 처분을 마친 후, 선생님께서 사주신 두부는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다시는 이런 벌을 받지 말라'는 말씀에는 따뜻한 관심과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방과 후 선생님 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선생님 전공인 상업부기를 배웠다. 경영의 언어라 불리는 회계를 처음 접한 곳도 바로 그 자리였다. 현대 그룹의 정주영 회장도 상경 후 처음 배운 것이 상업부기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지금도 복잡한 재무제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때 배운 기초 덕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시작했다. 10년이 흐른 뒤 도전한 사업은 예상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개업식 날, 내 아들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의 표정이 지금도 선명하다. 제자의 성공을 자신의 기쁨처럼 기뻐하시던 그 마음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느꼈다. 졸업 후 27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이제 선생님은 정년을 앞두고 계신다.

 

 

 

나는 이제 정년을 앞둔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내가 방과 후 수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한 제자 때문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라는 그 아이를 보며 나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방황하는 그 아이의 집에 가정방문을 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약속을 했다. '제가 어떻게든 아들을 졸업시키겠습니다'라고. 그는 졸업 후, 10년간의 직장 생활을 거쳐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개업식 날 보여준 그의 행복한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힘들었던 교직 생활이었지만, 성공한 제자들을 보면 교사로서의 보람을 느낀다.

 

새벽녘 교실에 들어서면 창틈으로 비치는 햇살이 먼저 반긴다. 37년간 이 작은 환영이 나의 하루를 시작하게 한다. 책상 위에 놓인 출석부를 넘기며, 어제의 일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 학생들의 꿈을 보는 일은 언제나 새롭다.

26살에 처음 교단에 섰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경험도, 노하우도 없던 시절이지만 철학을 만들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실업계 고등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이 좋은 직장을 얻게 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는 지금 여러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학교를 그만두려 했다. 아르바이트가 공부보다 재미있다며, 매일같이 지각하고 결석했다. 어느 날, 그의 집을 찾아가 등교를 종용했다. 정학을 받은 그에게 두부를 사주며 "다시는 이런 걸 받지 말라"라고 했던 날이 떠오른다. 그 후 방과 후에 내 집으로 데려와 상업부기를 가르쳤다. 지금도 그의 개업식 날 행복해하던 표정이 선명하다.

시간은 흘러 이제 정년을 1년 앞두고 있다. 후배들이 하나둘 교장으로 퇴임하는 것을 보며, 나도 마지막 피날레를 꿈꾸어본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교장 임기는 2년. 정년까지 1년밖에 남지 않은 나에게 그 자리는 그림의 떡이다. 후배들이 교장으로 퇴임할 때 나도 함께 은퇴했어야 했나, 하는 아쉬움이 가슴 한켠을 적신다.

몇일 전, 제자들이 찾아왔다. 이제는 모두 안정된 사업체를 운영하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대가 많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최저임금이 올라 신입보다는 경력자를 선호하고, 젊은이들은 자신의 가치보다 당장의 급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교육도 이런 변화에 발맞춰가야 함을 깨닫는다.

학교는 단순히 교육청의 예산을 받아 운영하는 곳이 아니다. 오직 학생들의 미래만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학생의 가정 형편은 어떤지, 어려움은 없는지,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꿈을 어떻게 지원해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육공무원이다.

37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방과 후 수업을 했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다. 지금도 아련한 제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 모두가 자신만의 자리에서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남은 교직 생활을 이어가려 한다.

이제 곧 퇴임을 앞둔 교실에서, 나는 다시 한번 창가에 비치는 아침 햇살을 바라본다. 37년이란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지만, 이 햇살처럼 따뜻했던 순간들이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학생들의 꿈을 키우는 일에 헌신했던 나의 교직 생활이, 어쩌면 그들에게도 아침 햇살 같은 존재였기를 소망해 본다. 

 

마지막으로 내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동문회는 우리 학교의 미래다. 후배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모교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동문회의 힘이다. 이제는 학부모도 젊어졌다. 젊은 감각으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야 할 때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실에서 꿈을 키워가는 후배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학교로 만들어주길 바란다. 

 

이것은 우리 교사들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동문이 학교를 위해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 37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며, 이것이 내가 제자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수업이다. 우리 학교가 명문으로 거듭나는 그 날을 먼 곳에서나마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