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청소년의 고백과 성장

2024. 12. 12. 10:02청소년 상담소(방황하는 청소년들 이해하기 위한)

2024년 마흔다섯의 나이에

극동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새내기가 되었다.

'청소년문제' 수업을 들으며 청소년 시절 방황했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슴 한켠에 접어두었던 그 시절의 아픔과 혼란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이제는 예비 사회복지사로서,

나와 같은 방황을 겪고 있을 청소년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

이 글은 나의 경험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아픔을 보듬고자 하는 작은 시도이다.

 

 

 

"나의 반항기: 이해받지 못한 날들의 기록"



열일곱,

그 나이에 나는 세상이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 어머님은 내 인생의 적군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돌아보니,

그때의 나는 그저 나를 이해해 주길 바랐던 것 같다.

누군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길,

내 선택을 존중해주길 간절히 원했던 시절이었다.

이제와 돌아보니,

그 시절의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중요한 조각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린 시절: 반항 이전의 나

 

반항심이 생기기 전의 나는 꽤 평범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운동을 좋아했고,

성적도 중위권을 유지했다.

부모님 말씀도 잘 들었고,

누나와 사이좋게 지냈다.

선생님들은 나를 '모범생'이라고 불렀고,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의 나는 그런 칭찬이 좋았다. 

부모님이 나를 자랑스러워하시는 모습에 뿌듯했고,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진정한 '나'로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기대에 맞춰진 

'착한 아이'의 이미지로 살았던 것 같다.

 


균열의 시작: 첫 번째 혼란

초등학교 시절, 나의 일상은 평범했다. 

아버지는 엄격하셨지만 공정하셨고, 

가정은 안정적이었다.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때로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일상의 규칙성이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6학년이 되던 해 여름,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친구들과 공을 차고 피곤했는지 낮잠을 자게 되었다.

한참을 자는데 누나가 나를 깨우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흐느끼는 소리.

내가 알던 세상의 중심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혼란의 시작

아버지의 부재는 내 삶에 큰 공백을 남겼다.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는 홀로 나를 키우시느라 더욱 바빠지셨고,

나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이 아버지 얘기를 할 때면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에는 잘 따르던 규칙들이 갑자기 의미 없게 느껴졌다.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졌고,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났다.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기도 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친구들이 질투가 났고,

그런 내 모습에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새로운 현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지만,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혼자 새 학기를 준비해야 했다.

나는 혼자서, 또는 고등학생 누나의 부분적인 도움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큰 혼란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단순히 한 사람의 상실을 넘어, 

나의 전체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깊어가는 갈등: 자아의 목소리


진로에 대한 갈등

진로 문제는 더 심각했다. 

나는 음악 관련 직종에 관심이 있었지만, 

어머님은 듣지도 않으시려 했다.

"공부만 열심히 해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만 반복하셨다.

내 꿈과 재능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어머님이 내 진로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지 못하신다는 점이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어떤 직업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그 직업의 장단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하셨다.

 

지금은 컴퓨터와 인터넷, 유튜브를 통해

청소년들이 직업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90년대 초반에는 지금처럼 정보화 시대가 아니었기에

혼자서 알아볼 수 있는 직업은 한계가 있었다. 

 

경제적 불안과 부모님의 모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혼자서 생계를 책임지게 되셨다. 

월급 40만 원으로 우리 가족의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이해가 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다.

 

방과 후면 매점에 모여드는 친구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 속엔 백 원 한 장 없었다. 

친구들이 과자를 나눠 먹거나 음료수를 마실 때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피했다. 

"야, 같이 가자!"
"아니야, 난 집에 가봐야 해."

거짓말이 습관이 되어갔다.

용돈이 없어서 함께하지 못한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깊어가는 고립

점점 친구들과 거리가 멀어졌다. 

하교 후 바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친구들은 하나 둘 멀어져 갔고, 

나는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갔다.

컴퓨터가 보급되는 중학교 2학년때는

친구들은 집에서 컴퓨터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나는 그 신기함에 빠져들었다.

어머니께 컴퓨터를 사달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현실은 냉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를 향한 원망

어머니를 향한 원망이 쌓여갔다. 

다른 엄마들은 자녀들 용돈을 챙겨주는데,

왜 우리 엄마는 그러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 나도 용돈 좀 주면 안 돼요?"
"지금은 어려우니 조금만 참자."

매번 같은 대답에 실망감은 더욱 커져갔다. 

어머니의 고단한 어깨를 보면서도, 

어린 마음에는 그저 서운함만 가득했다.

 


반항의 시작

점차 어머니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등교 시간을 어기기 시작했고, 

숙제도 대충 하거나 아예 하지 않았다. 

선생님께 꾸중을 들어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집에서는 더욱 반항적이 되었다. 

어머니가 퇴근하고 오셔서 피곤한 목소리로 

뭔가를 물어보실 때면, 대답 대신 방문을 닫아버렸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경제적 어려움과 아버지의 부재라는 

이중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어머니 역시 힘든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계셨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가난이 죄는 아니었지만, 

그 시절의 소외감과 외로움은 

내 성장기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반항과 구원의 순간들

 

 벼랑 끝으로의 질주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의 반항은 정점을 찍었다. 

용돈이 없어 답답하던 차에 

노래방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저녁마다 노래방에서 일하며 하루 만원을 벌었다. 

처음으로 내 돈이 생겼고, 

좋아하는 노래도 실컷 부를 수 있었다.

매점에서 과자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느꼈던 소외감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었다.


밤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수업시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날이 많아졌고, 

결석도 잦아졌다. 

결국 정학처분을 받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그곳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술과 담배를 배웠고, 

점점 더 위험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급기야 자퇴까지 고민하게 되었다.



 운명의 만남

그때 2학년 은사님이 나타나셨다. 

선생님은 내 상황을 깊이 이해하려 노력하셨다. 

어머니와 진지한 상담을 가지셨고, 

내가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로 하셨다.

첫 번째로 한 일은 노래방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하는 것이었다. 

대신 선생님은 나를 댁으로 초대하셔서

상업부기를 가르쳐주셨다.

수업이 끝나면 사모님이 항상 라면을 끓여주셨다.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단순한 라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어른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처음으로 진정한 스승을 만난 것이다. 

성적이나 체면을 위해서가 아닌, 

진심으로 한 학생의 인생을 걱정해 주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내 마음의 빗장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변화의 시작

3학년이 되자 나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더 이상 수업시간에 졸지 않았고, 

결석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서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누군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삶을 선택한 것이다. 

한 분의 참된 교육자가 한 학생의 인생을 바꾼 순간이었다.

 


구원의 손길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내가 정말 필요했던 것은 

누군가의 진심 어린 이해였다. 

아버지의 부재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방황하던 내게, 

2학년 은사님은 구원의 손길이었다. 

그분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셨고,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려 노력하셨다.

매일 저녁 선생님 댁에서 공부를 하며, 

사모님이 끓여주시던 라면을 먹던 시간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내 편이 되어줄 어른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단순한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넘어선, 

진정한 멘토와의 만남이었다.

 


반항의 진짜 의미

나의 반항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빈자리, 경제적 궁핍,

그로 인한 소외감에서 비롯된 절실한 외침이었다.

노래방 아르바이트, 잦은 결석, 심지어 술과 담배까지...

모두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은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깨달았다. 

진정한 반항은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실과 맞서 싸우는 것이라는 걸. 

선생님은 내게 그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셨다.


반항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성장의 필수적인 과정이 될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 주는 어른을 만나는 것이다.

 


미래를 향해

이제는 갱년기를 앞두고 있다.

아직도 가끔은 방황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 준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파괴적인 방법으로

내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은사님께서 보여주신 그 따뜻한 이해와 관심이, 

내 반항기를 무사히 지나게 해준 등대가 되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내게 큰 힘이 된다. 

어려운 상황이 올 때마다, 

나는 은사님을 찾아뵙는다. 

그리고 이야기하고 또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려 한다.

방황하는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이해와

지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은사님께 받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반항하는 아이들을 향한 손가락질은 쉽다.

 "요즘 애들은 왜 저럴까", "부모 교육이 잘못됐나"

 라며 비난하기는 더욱 쉽다. 

하지만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따뜻한 관심이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여주는 것, 그것이 첫 시작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훈계하고 조언한다.

"공부해야 한다",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들로 가득 채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잔소리 대신 필요한 것은 진심 어린 경청이다.

때로는 말없이 곁에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말하지 않는다고 재촉하지 말자.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강요하지 말자.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의 문을 열 준비가 필요하다. 

그저 기다려주자. 

이야기할 준비가 될 때까지,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나는 운이 좋았다.

 2학년 은사님이라는, 

나를 기다려주고 이해해 주는 어른을 

만났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모든 아이들에게 그런 어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모두가 그런 어른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리 지르는 아이가 있다면, 그 속에 숨은 아픔을 보자.
반항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뒤에 숨은 외로움을 보자.
침묵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기다리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비난이 아닌, 더 깊은 이해
더 큰 잔소리가 아닌, 더 작은 귀 기울임
더 빠른 재촉이 아닌, 더 긴 기다림이다.

그것이 내가 은사님께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이었고,
이제는 내가 실천하고 싶은 삶의 자세이다.

 


반항하는 청소년들에게

지금 이 글을 읽는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의 반항심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 반항을 어떻게 표현하고 

해결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 

파괴적인 방식이 아닌, 건설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독립과 성장으로 가는 길이다.

부모님도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하자. 

그들도 처음으로 사춘기 자녀를 키우는 

부모일 수 있다.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로 대화를 시도해 보자. 

때로는 그런 작은 시도가 큰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나의 이야기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청소년들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길 바란다. 

지금 겪고 있는 혼란과 갈등은 결국 

당신을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시기를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힘내자.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다.

 


에필로그: 성장은 계속된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많은 것을 돌아보았다.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가슴 아팠지만,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반항은 끝났지만,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도 새로운 도전과 갈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강해졌다.

더 성장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가족들, 친구들, 같이 대학을 다니는 학우님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지지해주고 있다.

그들의 사랑과 신뢰를 발판으로,

나는 계속해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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